초대 문화부 장관 이어령 교수의 큰딸 이민아 변호사가 간증집 「땅끝의 아이들」을 내놓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그동안 이민아를 대신해주던 많은 수식어를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모두 일어났다고 볼 수 없을 만큼, 험난했던 인생의 끝에서 그녀가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사진에만 눈에 익은 기자는 올해 52세가 된 이민아 변호사를 처음 봤을 때 조금은 놀랐다. 출판사 관계자가 “건강이 좋지 않다”라고 하더니, 그녀의 얼굴에는 험난한 인생의 비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먼저 건강부터 염려됐다. 올 초에 백내장 수술을 했고, 오래전 일이긴 해도 암 수술도 세 번이나 받은 그녀였다. 가녀린 몸매에 소녀 같은 웃음을 짓는 그녀는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도 힘들지 않다”라며 기자를 안심시켰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이민아 변호사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발간된 간증집 「땅끝의 아이들」에서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냈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닥에 내려놓은 것이다.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유년 시절의 아픔과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혼, 싱글맘의 고통, 세 차례에 걸친 암 수술, 둘째 아이의 자폐 진단, 그리고 창창한 26세 아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까지 담담히 풀어냈다.
“한창 힘들었을 때 간증집을 구해서 많이 읽어봤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는데 왜 나는 못할까, 하는 실패감이 들었어요. 그때의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쓰게 됐어요. 결국 우리 힘으로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어요. 내가 지쳐 쓰러졌을 때, 나를 구원한 힘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그녀의 고백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를 실망시키기 싫어서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해야 했던 외로운 소녀, 이민아. 늘 아버지 체면과 명성의 그늘에 살아야 했던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텅 비어 껍데기만 있는 달팽이와 같았다”라고 말한다. 바쁜 아버지는 품속에 안기려는 딸을 밀쳐냈고, 늘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랐던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밤마다 잠이 안 올 때면 아버지 서재에 몰래 들어가 아버지의 술을 훔쳐 먹기도 했다.
“저는 항상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를 원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소망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데까지 갔던 것 같아요. 제 스스로 내가 원하는 사랑을 아버지에게 못 받을 거라 생각했죠.”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조기 졸업하고 죽을 만큼 사랑한 남자, 김한길 전 국회의원과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저는 참 말을 잘 듣던 아이였어요. 마음이 약해서 반항을 못했어요. 그런데 언젠가는 아이가 부모의 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때의 진통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되기가 힘들 만큼 마음이 약해서 자신의 영역을 설정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문제였던 거죠. 제가 처음으로 제 의지대로 했던 것이 바로 남편을 선택하는 일이었죠.”
가진 것 없는 학생 부부의 생활은 빠듯했다. 당시에는 유학생의 공식적인 취업이 금지되던 때라 남들이 다 꺼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은 고되기만 했다.
그 와중에 첫째 아들 유진이가 태어났고, 이민아는 아이를 키우며 헤이팅스 로스쿨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힘들었을 때도 제가 한 선택이 잘한 것이라는 걸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힘들다는 사실조차 이야기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저를 밀쳐내신 게 아니라 제가 아버지를 밀쳐내고 떠나왔던 거더라고요.”
4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이혼 할때까지 아버지에게 투정 한 번 안 하던 이민아는 이혼하자마자 아버지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결국 아버지를 망신시킨 딸이 된 것 같아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런데 이혼하고 돌아온 딸에게 화를 낼 줄 알았던 아버지는 “애가 말랐다. 밥 좀 먹여”라는 말로 마음을 대신했다. 그때 이민아 변호사는 자신이 지금껏 아버지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수년간 쌓여왔던 오해와 거리감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은 계속 만들어가는 집인 것 같아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할 거라는 기본적인 신뢰와 내 딸이 나를 존경한다는 기본적인 토대가 가장 중요해요. 실패 속에서 약해졌던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 생애 가장 뜨거운 불
이혼 후 이민아 변호사는 학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이를 헤이팅스 로스쿨에 부속된 탁아소 겸 학교에 맡겨놓고 공부를 했다.
“저에게는 고아 멘털리티가 있었어요. 싱글맘으로 3년 동안 일하고 공부하고 아이를 돌보는 걸 혼자서 해내야 했거든요. 내가 돈을 안 벌면 우리 둘은 굶어죽겠지, 내가 잘못하면 우리는 끝나, 하면서 저는 유진이만 쳐다보고 유진이도 저만 바라봤죠. 저의 아픔과 짐을 수없이 아이에게 지워주었기 때문에 아이가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이민아 변호사는 본인이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다보니 편두통, 위궤양, 요통, 불면증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유진이가 16세가 됐을 무렵 아이도, 이민아 자신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아이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기까지 1년간 요란한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그 외에는 늘 긍정적이고 밝았던 아이.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IQ 159의 똑똑하고 멋있는 청년이었던 유진이는 26세 되던 해 여름, 갑자기 쓰러져 코마 상태에 빠진 뒤 19일 만에 병명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저에게는 가장 뜨거운 불이었어요. 장례식 날 이후 꼬박 3년을 울었어요. 1년은 거의 매일 울었고요. 3개월 동안은 아예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이불 속에서 울기만 했어요. 천국을 믿을 수 없었고,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그래도 이민아 변호사는 신앙의 힘으로 침대 밖, 세상 속으로 다시 걸어 나왔다. 유진이 또래의 비행 청소년들을 만나며 아들에 대한 사랑을 돌아보고 ‘내 아이’와 ‘다른 아이’가 다르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는 유진이가 떠나던 해인 2009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청소년 구제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사랑의 기적을 믿는다
지난 2월, 이민아 변호사는 국내에서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안경이나 렌즈 없이 밝은 세상을 보고 있지만 사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안경으로는 교정이 되지 않을 만큼 고도근시였던 그녀는 렌즈를 껴도 운전을 겨우 할 만큼 시력이 좋지 않았다. 평생을 렌즈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늘 망막 손상의 위험이 있었고, 이미 렌즈에 닳고 닳아 의사로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도 여러 번 들었다. 자칫 망막이 찢어지면 영구적으로 복구할 수가 없고 점차 앞을 보지 못해 실명한다는 것이었다.
재혼한 후 낳은 둘째 아들이 자폐 진단을 받은 것은 이때 즈음이었다. 열 두살이 되도록 아이는 엄마의 지시를 이해하거나 따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의 치료를 위해 하와이로 건너가 특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미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겼고 중학교도 1년을 다니다가 쫓겨난, 사면초가의 상태였다.
재정 상태가 좋지 않던 하와이 크리스찬 스쿨은 개인적인 관리가 필요한 둘째 아들을 받아주는 대신 그녀가 상근 보조교사로 일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제가 단순한 작업을 잘 못해요. 학교에서 제가 하는 일이 주로 채점이었는데, 자꾸 틀리니까 선생님이 보기엔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하셨나봐요. 변호사라는 여자가 단순한 채점도 제대로 못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거죠. 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제가 괘씸하게 보였는지 점점 일거리가 많아졌어요. 그때 좋지 않은 눈으로 엄청난 양의 채점을 해야 했기에 눈에 큰 무리가 왔어요.”
하지만 엄마의 정성이 통했는지 1년이 흐르자 둘째의 자폐 증세가 기적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폐증은 불치병에 가까워 회복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둘째 아이는 이제 운전도 하고 일반적인 생활도 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이민아에게는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망막박리’ 현상이 일어나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수술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이민아는 물론 이어령 교수 부부도 절망에 빠졌다. ‘한국 최고의 지성’이자 무신론자, 이성주의자임을 자처하던 70대 학자, 이어령은 2007년 개신교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어령은 자신의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민아 변호사는 망막박리 7개월 만에 찢어진 망막이 다시 붙는 기적을 경험했으나 다시 앞이 보이지 않아 병원에 찾아갔을 때 백내장 진단을 받고 현재는 수술한 후 양쪽 눈 시력을 모두 회복했다.
“셋째와 넷째는 첫째와 둘째로 인해 흘리고 뿌린 눈물이 선물로 준 아이들이에요. 둘째가 19세, 셋째가 17세, 넷째가 15세예요. 첫째가 유난스러운 사춘기를 보낸 터라 아이 셋이 모두 10대가 되는 때를 무척 두려워했는데, 이 아이들은 그런 것도 없어요. 참 마음이 착한 아이들이에요.”
이민아 변호사는 인터뷰 다음날 막내딸이 한국에 들어온다며 즐거워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한국에 머물고 있는 엄마의 여정이 길어지자 막내딸이 한걸음에 달려오는 것이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막내딸은 잠시라도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계획이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되살아난 삶
사실 이민아 변호사는 세 번의 갑상선암 수술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다. 갑상선암의 사망률은 극히 낮지만 세 번의 재발로 심신이 쇠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젊은 사랑의 묘약에 취해 아빠 품을 떠났던 22세 때부터, 실명 위기에 처했던 올해 초까지, 30년 동안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았던 이민아 변호사. 하지만 기자를 맞는 그녀의 웃음은 티 한 점 없이 맑고 순수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유와 평화로움을 누려본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죽음에 자유로워지면서 사는 게 더 즐거워지고 무서운 것이 없어졌죠. 저는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어요.”